익명성이란 요소는 인터넷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도 하며 또 매우 성가신 요소로 볼 수 있다. 만약 익명성이 없었다면 인터넷 세상이 이렇게까지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익명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온라인상에서 평범하지 않은, 개성있는 발언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익명성을 통한 비방, 욕설, 범죄 등의 폐해는 이미 우리 사회를 통제 불능으로 몰고갈 정도로 팽배해졌다. 모든 매체에서는 인터넷 상의 건전한 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광고 및 캠페인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지만, 인간의 내면적인 심리상태에 기인한 익명성의 범죄는 이미 그러한 수단으로 교화하기 어려울 지경이 이르렀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이트들은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자 등록시에 실명확인을 비롯한 개인정보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렇게 제출된 개인정보는 프라이버시의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 유효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했더라도 진실성이 결여되고 프라이버시 문제로 인해 열람이 불가하다면 이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이트 관리자에 대한 신뢰를 갖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실제로 옥션에서 일어나는 사기사건들을 조사해보면 관리자가 막을 수 없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즉 사이트를 관리한다고 해서 사용자가 사이트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무조건적인 익명성의 상실은 앞서 말한 익명성의 장점, 다시 말해 인터넷만의 장점을 상실케 할 수도 있다. 익명성을 상실한 사용자들로만 이루어진 게시판은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현실에서는 한 순간의 발언이 자신에게 칼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그러한 감각은 정치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인터넷 사이트의 난폭성도 마찬가지다. 방문자가 익명성을 잃게되면 난폭성은 사라져도 사이트의 방문자 자체가 줄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특히, 남몰래하는 취미와 같은 사이트는 자신이 그러한 취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주위에 알리고 싶지 않아하는 방문자를 잃을 수도 있다.

 익명성은 인터넷의 고유한 특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터넷의 특성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앞으로의 웹은 현실세계와 더욱 밀착된 형태로 발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공정한 거래를 원하고 인터넷의 가능성을 믿고 인터넷을 신뢰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신뢰가 일부 악의 있는 사람들 때문에 무너져서는 안된다. 익명성이 지닌 고유의 장점을 살리면서 보다 신뢰할 수 있는 인터넷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인터넷 실명제와 같은 제도가 매우 중요하다.

 실명제는 두 가지로 나뉜다. 게시판에 글을 쓸 때 실명이 나오는 실명제와 실명인증만 받는 실명제가 있다. 후자는 정부가 의무적으로 시행하게 한 실명제이며 이 실명제는 닉네임이나 아이디가 글 작성시에 나와도 상관이 없다. 게다가 이 실명제는 정부가 의무적으로 실명제를 도입하게 한 사이트 중 디시인사이드와 한 두개 사이트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시행돼오던 제도이다(네이버, 다음, 엠파스, 파란 등 웬만한 인터넷 포털사이트나 언론사이트에는 실명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이 제도는 디시인사이드를 겨냥하고 시행된 제도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실명제를 시행하고 있는 사이트 중 토론이 활성화된 사이트는 올해 촛불집회의 구심체가 되었던 다음의 아고라를 들 수 있다. 이곳은 간접실명제(6번에서의 후자)가 시행되고 있지만 토론의 열기는 매우 뜨겁다.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토론이나 네티즌 청원은 뉴스에 까지 소개될 정도로 좋은 글과 청원이 많다. 게다가 다양한 직업과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사람들이 활동하는 곳으로 사회 이슈에 대한 여러 생각을 듣고 자신만의 의견을 정립할 수 있다.

 2006년 9월 25일부터는 주민등록번호 단순 도용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으며(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 실명제를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사이트들은 대부분 강력한 보안체계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주민등록번호는 이미 인터넷상에서는 존재의 가치를 잃은지 오래다. 주민등록번호가 너무 무분별하게 사용되다 보니 약간 지명도가 떨어지는 사이트 등에 가입한 적이 있다면 이미 유출된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리서치 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인터넷 사용인구의 75% 이상은 이미 도용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전무하다. 우리나라는 외국과 다르게 포털이 인터넷의 대부분을 독점하고 있다. 외국의 댓글문화와는 달리 욕설과 비방이 난무한다. 이는 흥분하기 쉬운 국민성과도 연관이 있다. 앞으론 모든 나라가 점진적으로 실명제를 도입할 것이다.  버스 승객이 10000명이라고 보면 10명의 무임승차는 막을 수 없다. 전 세계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날이 온다면 모두가 우리 선례를 따라 도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꼭 실명제로만 네티켓을 확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이나 도덕관념상 가장 효율적인 대안이 인터넷 실명제일 것이다. 악플러들은 대부분 자신의 익명성이 깨졌을 때 자취를 감춘다. 실명제는 사이버 범죄를 막기 위한 최소의 조치이다. 물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이것으로 막을 수 없겠지만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감정적으로 악플을 다는 사람들에게 이성을 되 찾아 줄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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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를 할 때 지식을 쌓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영어단어나 숙어를 기억하는 '암기'부터 어떤 문제가 부딪혔을 때 처음에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하는 '기술' 또는 '육감'적인 것까지 모든 것들을 지식이라 부른다면 지식은 단순히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어떠한 지식이든 완전히 익히기 위해선 머릿 속에 마구 집어넣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이것을 마치 시험기간에 막판 스퍼트를 내서 좋은 점수를 얻더라도 막상 시험이 끝나면 금방 다 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혹자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난 그 보다 한 수 위의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단계까지 가면 공부는 '암기'가 아닌 것이다. 어떠한 지식을 '마스터 했다' 는 것은 지금까지 잊어버리기를 무수히 반복하여 열심히 외우고 문제를 푸는 상황이 끝나고 해당 내용이 완전히 내게 체화되었다는 느낌이 들게한다. 이는 매우 기분좋은 느낌이다. 갑자기 공식을 잊어버리지 않게 되고 시험 보기 전에 하루 종일 공부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게 정확히 문제를  풀 수 있는 습관화된 상태가 그것이다.

 그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 학습의 목표이다. 반대로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면 기억력에 자신이 없어도, 오랫동안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지 않아도 자신이 신체 일부가 된 것처럼 그 지식을 익힐 수 있게 된다. '시험 공부는 원래 평소에 하는거야'라는 말 처럼... 대부분의 교육 시스템은 그 경지까지의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성하지 못한 채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기만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마찬가지로 인터넷 상에서의 지식 또한 단순히 정보를 검색하고 긁어모으는 것만으로는 체화시키기 어렵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클릭 몇 번만으로 얻을 수 있는 현대의 학생들은, 정보의 깊이있는 이해력이 더욱 떨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치 시험 시간에 인터넷만 이용할 수 있다면 모두가 100점을 맞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수학 공식과 영문법, 심지어는 논술형 답안까지 인터넷을 약간만 찾으면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잘 정리만 하면 그야말로 서점에서 팔고있는 참고서에 지지 않을만한 많은 정보들이 탄생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 암기해야 할 것에 관한 지식은 남아 돌 정도로 웹에 존재하는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공부 때문에 고민하며 괴로워 한다. 웹의 수많은 정보량은 분명히 대단하다. 하지만 그러한 단편적인 지식이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엔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현실세계에서 선생님이나 학원강사에게 열심히 배워도 얻지 못하는 것을 기계적인 존재인 인터넷에더 얻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치 영화에서처럼 USB 메모리를 뒷통수에 꽂을수 있다면 또 모를까.. 실제 열심히 가르쳐주는 영어회화수업은 영어를 잘하기 위한 가장 유용한 수단이다.

 그것과 똑같은 것을 인터넷에서 하려 한다면 열심히 이끌어 줄 수있는 어떤 존재가 필요하다. 단지 지식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자신이 어디를 모르는지를 알려주고 그곳을 정확히 안내해줄 수 있는 구조화된 시스템 말이다. 마치 여러 형태의 서적을 참조해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도움말' 시스템 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지식을 나열하고 마음대로 참조해 달라는 것보다 '이렇게 하면 알 수 있어' '여기를 모르면 여기를 보면 좋을것 같아'라는 식의 친절한 시스템이 인터넷에 구축된다면 어떨까?

 참고서를 직접 엮어본 적도 있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저자가 단순한 편집과 가공을 통해 자기만족에 빠지기 무척 쉽다. 이런 자기 만족형의 독립된 서적과 정보들은 인터넷이라는 구조를 통해 엮일 수 있다. 서적에 비해 웹은 한 단계 더 손을 봐준다. "여기를 모르겠습니다"라는 사용자의 목소리를 모아 점점 데이터를 쌓아나가면 현실세계에서의 서적 보다 훨씬 도움이 될만한 구조화된 지식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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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MIT 해커들은 대형 컴퓨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학교 당국과 IBM사의 강력한 통제에 저항했다. 매일 밤 대학 내 건물에 숨어들어가 해킹을 즐겼다.

 GNU는 소프트웨어 해커들이 만든, 저작권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이들이 모임이다. 엄밀히 말하면 리눅스도 이런 정보자유화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GNU란 'GNU는 유닉스가 아니다'(Gnu is Not Unix)를 의미하는 재귀적 약어다. GNU는 유닉스와 완벽하게 호환하는 소프트웨어 시스템이며 사용 가능한 모든 이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작성한 것이다.

 GNU 선언문은 GNU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 리차드 스톨만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GNU선언문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컴퓨터 사용자 공동체는 소프트웨어의 발전을 지원한다.

어느 수준의 지원을 할 것인가에 대한 사항을 공동체 모두가 함께 결정한다.
자신의 몫이 어떤 프로젝트에 쓰일 것인가에 관심 있는 사용자들은 이를 스스 결정 할 수 있다.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은 결국, 더이상 생계를 위해 고되게 일할 필요가 없는 풍요로운 세계로 가는 한 단계인 것이다. 사람들은 법률 제정이나 가정 상담, 로보트 수리, 천체 관측 등의 주당 열 시간 정도의 근무 시간을 마친 후에는 프로그래밍과 같은 자신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일에 자신을 몰입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될 것이다. 더이상 프로그래밍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미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가 시간이 아직 충분히 보장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자유 경쟁에 반하는 관료 제도와 저항들에 의해서 생산적인 활동에 많은 비생산적 요소들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이러한 문제들을 충분히 개선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풍요를 위한 우리의 기술적 성과들이 우리들 자신의 노동을 감소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제시한 정보자유화 운동의 틀은 해커윤리를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해커는 원래 정보 엔지니어를 이르는 말이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개인용 컴퓨터가 있게 한 장본인이나 달므없다. 그러나 80년대가 되며 이 용어는 남의 정보를 함부로 왜곡, 절취 파괴하는 이들을 가르키는 말로 쓰였고, 그 때문에 악성 해커들을 크래커라 부르기도 한다.

  1950년대, 해커라는 말의 의미가 지금처럼 부정적인 뜻이 아닌, 전문가 집단을 일컫는 말로 쓰였을 무렵 GNU에 의한 해커윤리가 제정, 공표되었다.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이미 그들은 Web 2.0, 나아가 Web 3.0의 정신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GNU 계열의 해커윤리이다.


해커윤리 제 1항
컴퓨터에 대한 완전한 접근을 보장 받아야 한다.

해커윤리 제 2항
모든 정보는 개방되어야 하고 공유되어야 한다.

해커윤리 제 3항
권력에 대한 불신 - 분권화를 촉진하라

해커윤리 제 4항
해커들은 해킹으로만 심판받아야 하며, 절대 학력이나 나이, 사회적 지위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해커윤리 제 5항
컴퓨터를 통해 예술과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

해커윤리 제 6항
컴퓨터는 현실 생활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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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요에 이르는 길은 '많이 생산하거나' 아니면 '적게 원하는 것'의 두가지 방법이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더 많이 생산한다. 욕망은 끝이 없기에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부족하다. 욕망은 결핍과 같은 말이다. 부족하지 않다고 느낄 때 욕망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하나 풍요의 길은 적게 원하는 것 이다.

 적게 원하였던 석기시대 사람들은 하루에 3∼4시간을 일하고도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그것은 적게 원하는 선(禪)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21세기 디지털 혁명에서 컴퓨터덕분에 하루에 3∼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놀이시간에 보낼 것을 꿈꾼다. 혹시나 우리는 석기시대 사람이 누렸던 풍요를 다시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해 오지는 않았는가. 그렇다고 풍요로운 핑크 빛의 미래가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욕망코드가 계속 출현하면서우리는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석기시대는 살린즈의 표현대로 시원(始原)의 풍요로운 사회였다. 우리가 찾고자 했던 세계는 이미 존재했었다. 잠깐 잊어버렸을 뿐이다. 1만년전 식량이 부족했던 석기시대에 소식할 수밖에 없었던 원시인의 유전자 정보는 아직 도 우리 몸에 축적되어 있다. 그래서 현대인의 육체는 과식에 적절히대응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직도 우리 몸은 과식의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권하는 허상의 욕망을벗겨 내면, 우리를 언제든지 순연(純然)의 공동체 사회로 초대하는 유전자의 욕구정보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목적은 이윤획득에 있다. 원시 공동체는 나눠주고 파괴하기 위해 생산한다. 대인(빅맨)은 힘들여 거둔 것을 부족민들에게 나눠주고 귀중한 기름을 태워 없애는 포트래치의 축제를 벌인다. 대인은 자신 의 생산물을 없애는 대신에 명예(honour)를 얻는다. 자신이 획득한 사냥감을 몰래 감춰 놓는 일은 죄악이다. 공동 체 사회는 나누지 않고 혼자 쌓아 두는 일을 금기하였다. 원시사회에서 +물질을 움직이는 것은 공동체의 가치와규범이었다. 왜, 원시인들이라고 혼자서 배불리 먹고 싶은 이기심이없었겠는가? 단지 공동체 사회가 이를 타부시하여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잠을 도둑맞은 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24시간 사회'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살린스의 분석으로 보면 채집민들의 수면량은 어떤 문명시대보다도 긴 거의 12시간이었다. 노동 시간은 하루 4, 5시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러고서도 남자 한 명이 4~5명을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구의 5분의 1 이상이 나머지 사람들이 식량을 대기위해 농업에 종사해야만 했던 제 2차 세계대전 때의 프랑스인들 보다도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무기 중노동의 형을 복역하고 있는 것은 야만스러운 구석기시대의 채집민들이 아니라 바로 생산과 소비의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이 아닐까?


An American businessman took a vacation to a small coastal Mexican village on doctor’s orders. Unable to sleep after an urgent phone call from the office the first morning, he walked out to the pier to clear his head. A small boat with just one fisherman had docked, and inside the boat were several large yellowfin tuna. The American complimented the Mexican on the quality of his fish.

“How long did it take you to catch them?” the American asked.

“Only a little while,” the Mexican replied in surprisingly good English.

“Why don’t you stay out longer and catch more fish?” the American then asked.

“I have enough to support my family and give a few to friends,” the Mexican said as he unloaded them into a basket.

“But… What do you do with the rest of your time?”

The Mexican looked up and smiled. “I sleep late, fish a little, play with my children, take a siesta with my wife, Julia, and stroll into the village each evening, where I sip wine and play guitar with my amigos. I have a full and busy life, senor.”

The American consultant scoffed, “I am business consultant and could help you. You should spend more time fishing and, with the proceeds, buy a bigger boat. With the proceeds from the bigger boat, you could buy several boats, eventually you would have a fleet of fishing boats. Instead of selling your catch to a middleman you would sell directly to the processor, eventually opening your own cannery. You would control the product, processing and distribution.

“You would need to leave this small coastal fishing village and move to Mexico City, then LA and eventually NYC where you will run your expanding enterprise.”

The Mexican fisherman asked, “But senor, how long will this all take?”

To which the American consultant replied, “15-20 years.”

“But what then, senor?” asked the fisherman.

The consultant laughed, and said, “That’s the best part! When the time is right, you would announce an IPO and sell your company stock to the public. You’ll become very rich, you would make millions!”

“Millions, senor?” replied the Mexican. “Then what?”

The American said, “Then you would retire. Move to a small coastal fishing village where you would sleep late, fish a little, play with your kids, take siesta with your wife, stroll to the village in the evenings where you could sip wine and play your guitar with your amigos.”


- Timothy Ferriss  <The 4 hour work -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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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과 같은 사이버 공간에서는 살아있는 인간의 몸뚱이와 그 체온을 느낄 수가 없다. 1과 0의 숫자로 만들어내는 비트의 세상은 무정한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의 미래는 결핍된 그 정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우리는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수다를 떨다 끊을 때 하는 소리가 "자세한 것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하자"다. 그렇게 실컷 말하고도 직접 만나서 할 이야기가 또 있을까? 만나서 직접 말하겠다는 자세한 말은 다름아닌 전화로는 나누기 힘든 '정'의 말인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직접 말과 마음을 주고 받는 현실세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미흡한 것으로 남는다.

 프랑스의 극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전화에 대해 참으로 애처로운 말을 남겼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바로 귓전에서 울려오는데 그의 몸은 너무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 그래서 전화는 떨어져 있는 애인과의 거리감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한다. 가까운 곳에서 속삭일수록 거리는 그만큼 증대되고 만남의 갈증은 더욱 격렬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IT기술을 RT(Relation Technology)로 바꿔야 한다. RT는 인터넷을 통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기술로서 '테크놀로지'라기 보단 '예술'에 가까운 영역이다. 이는 조지나이프의 소프트파워와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마케팅이나 경영분야에서는 CRM과 같은 고객관리나 SNS로 통한다.

 오늘날의 소통은 정에서 나온다. 싸이월드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한국인의 정을 건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인터넷 상에서의 행위는 익명성으로 인한 무정한 공간이라 생각하는 경향이있다. 사람들은 아이디 혹은 별명이라는 탈 뒤에 자신의 본질을 교묘히 가린채 인터넷이라는 가상현실에서 한없이 무질서해지는 '통제불능의 아나키'의 극치를 보인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웹 상에서의 공간은 심지어 정보에서조차 믿음과 신뢰가 사라지고 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뢰에 바탕을 둔 소통이다. 네트워크는 기본적으로 믿음을 전제로 한다. 상호간에 믿음이 없다면 네트워크도 웹도 성립될 수 없다. 정(情)은 한국인만이 가진 고유한 민족특성이다.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언어도 정의 개념을 오롯이 대체할 수 없다.

 情과 信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에 근거를 제시한다. 앞으로의 SNS는 두 가지 가치를 얼마나 잘 녹여내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갈릴 것이다.





 생활(living)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삶(life)은 어디에 있는가

지혜(wisdom)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생활은 어디에 있는가

    지식(knowledge)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정보(information)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T.S. 엘리엇 <The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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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에디슨이 1877년 7월 특허를 신청해 다음 해 2월 등록된 포노그래프는 인류 최초의 청각정보 축적기술이다. 사진기가 빛을 잡아 축적하는 기술이라면 에디슨의 포노그래프는 '소리의 자본주의'라는 20세기의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만들어내는 방아쇠가 되었다. 처음으로 물건처럼 소유할 수 없는 빛과 소리를 사고팔 수 있는 놀라운 시장 자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은 이미 산업기술에서 정보 미디어기술로 나가는 터널을 뚫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산업주의 시대를 살았던 에디슨은 자신이 만든 축음기각 지식정보사회의 탄생을 알리는 미래의 소리를 담고 있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에디슨과 축음기의 역사는 바로 성공한 에디슨의 모습 속에 숨겨진 실패한 에디슨의 어두운 얼굴이다. 이상하게도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금언이 에디슨의 축음기 발명에는 통용되지 않은 것이다. 특별한 필요성의 산물로 축음기가 발명된 게 아니라는 사실은 그가 제출한 당시의 특허 서류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제시한 필요성의 용도는 ①편지의 필기와 각종 속기의 대체 수단, ②맹인을 위한 소리 책, ③스피치 교수 장치, ④음악 재상기, ⑤가족의 추억이나 유언 기록, ⑥장난감, ⑦뉴스, ⑧각종 말의 보존 장치, ⑨교사의 설명을 재생하는 교육기기, ⑩전화 대화 녹음 등이다.

 그가 생각한 포노그래프는 오늘날의 녹음기 같은 것으로  ④를 제외한 나머지는 수십 조 원에 달하는 음악 미디어의 시장성과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특히 그는 다른 기계와 달리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콘텐츠라는 다른 성격의 원리가 교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가 안 것은 단지 음을 녹음하여 축적할 수 있는 기계기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에디슨은 소리의 자본주의라는 엄청난 새시대의 시장을 열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와 문화콘텐츠라는 지식정보사회의 입구를 열어놓고서도 10년 동안이나 그 기술을 방치해두고 있었다.

 음향을 기록한다는 뜻의 포노그래프라는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음의 인풋에만 관심을 두고 아웃풋(재생)에는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던 에디슨의 기자들 앞에서 행한 축음기 공개실험장에서의 에피소드도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에디슨에게는 축음기가 음악 미디어가 될 수 있다는 지식정보, 즉 기계기술 이상의 콘텐츠에 관한 문화 마인드가 없었던 것이다. 축음기를 만든 것은 에디슨이 분명했지만 오늘과 같은 디스크 산업, 그리고 미디어 산업에 소리축적 기술을 이용한 것은 에디슨이 아닌 베를리너요, 영국 그라모폰 사의 오언이요, 최초로 음악 살롱을 만든 프랑스의 파테였다.

 에디슨의 좌절을 통해 우리는 지식정보사회에서 고부가가치를 유발할 수 있는 산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화 콘텐츠, 픽션, 디자인 파워가 결합된 미디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실패한 에디슨이 새로운 21세기를 여는 '트리거(Trigger)'로 작용한 것이다. 에디슨의 한숨 속에서 지식정보산업의 앞날을 내다볼 수 있다.

 또한 에디슨의 실패를 통해 특허권이 지식정보를 키우는 동인인 동시에 제약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특허법의 양날의 칼이 발명왕 에디슨의 개인사에서 최초로 징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에디슨의 실패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무엇보다 소중한 교훈은 다니엘 벨이 말하고 있듯이 기계기술이 이제는 지적 기술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증기기관을 만들어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된 제임스 와트는 보일러공이며, 20세기 전기시대를 연 에디슨은 통신기술자 출신이다. 에디슨은 그 많은 전기기기를 발명했지만 맥스웰의 자장이론과 같은 물리학은 몰랐다. 지식정보사회의 새로운 기술발명은 땜장이 기술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IT나 BT는 기초과학과 고도의 전문지식, 그리고 복잡한 과학이 서로 얽힌 복합적 지식 없이는 새로운 기술혁명을 이뤄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정보사회를 오해하고 있다. 소리를 축적하는 청각정보 시스템을 만들어놓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랐던 에디슨처럼, 그리고 사람이 없는 파리의 도심 풍경만을 찍은 외젠 앗제(Eugene Atget)가 출현하기까지 사진기를 만들어놓고도 거의 반세기 동안 인물사진밖에는 찍을 줄 몰랐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오늘날 인터넷기술을 비롯하여 그 많은 IT들이 바로 실패한 에디슨과 똑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 그래서 IT를 산업기술처럼 쓰려 했다가 닥친 이른바 e이코노미의 거품경제, 엔론, 월드컴의 부정 분식회계로 맞은 증권시장의 붕괴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몰고오고 있다.

 베를리너는 단순한 과학기술자가 아니라 시인이요, 자선사업가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21세기를 움직이는 사람은 에디슨의 기술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름도 생소한 베를리너의 상상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이어령, <디지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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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秋에 올리는 글...

2008/10/2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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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의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은 세계에 쳐진 거미줄이라는 뜻이지만 거기에는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비유 이상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발신 지향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터넷은 거미줄이고 그것에 접속하는 수신자들은 홈페이지라는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이 된다. 그리고 그 먹이가 언제 걸릴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개미는 일한 만큼의 노동대가를 얻고 또 집단적 조직에 의해서 자기편과 남의 편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거미의 노동에서는 정반대로 정보발신이 일종의 투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반면, 수신 지향적인 정보문화의 비유체계에서 인터넷 접속은 헌팅(사냥)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인터넷은 거미줄에서 사냥터로 변하고 이번에는 발신자가 사냥감이 된다. 정보의 숲은 순식간에 황폐해진다. 그 극단적인 예가 해커라 불리는 밀렵자들이다.

-이어령


이어령 교수가 '디지로그'에서 설파한 내용이다. 현실 세계의 냉혹함은 웹 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사람들이 웹 사이트를 생성하고 또 방문하는 모든 행위가 마치 곤충들의 본능과도 같음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웹을 이용하는 모든 행위자들이 그러한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까?
물론 행위의 목적을 정확히 인식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 것이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Only Click User의 경우에 자신들의 인터넷 사용 습관을 완전한 자율성을 바탕으로 형성해 나가지는 않는다. 웹 서비스 기획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고객들은 매우 냉혹하지만, 그들의 행위 패턴은 결국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웹 서비스 하나를 론칭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목 좋은 나뭇가지 사이에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수천만의 네티즌들이 언젠가는 자신이 쳐 놓은 거미줄에 걸릴거라 생각하고 마치 떨어지는 감을 기다리는 여우처럼 손 놓고 있어선 안된다. 또한, 초기의 부진을 현실의 냉혹함이란 핑계 하에 자기 합리화 하고 좌절하는 것 또한 절대 삼가해야할 마음가짐이다.

이어령교수는 발신지향적인 서구문화와 수신지향적인 동양문화의 융합을 강조하고 있다. 참여, 공유, 개방의 키워드를 가진 web 2.0시대가 열리면서 사람들은 인터넷이란 공간이 단지 정보를 습득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생산해 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웹 서비스를 만드는 기획자의 경우엔 단순히 수신의 패러다임이 발신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다는 것 이외에 유저들이 이용하게 되는 동기를 끌어올 수 있는 선전(propagenda)을 할 수 있어야한다. 다시 말해 언젠가 우연히 방문하게 된 사이트가 한 순간에 모든 패턴을 다 변화시킬 순 없기 때문에 끊임없는 습관의 혁신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회는, 특히 동시 접속성과 유행성이 그 어떤 환경보다 중요하게 드러나는 웹 상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때로는 자신의 행위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조차 모른 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이는 때로는 주위 사람들의 강요와 권고에 의해서, 혹은 자신의 만성적인 습관에 의해서 마치 자연의 본능처럼 그렇게 이끌려 가는 경우가 많다.

기획자는 그러한 WWW의 습성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과 문화 사이의 괴리 현상 때문에 새로운 웹 환경은 산업시대에 우리가 겪은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얼굴없는 문명과 사회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짙다. 독점할수록 그리고 희귀할 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산업시대의 상품들과 달리 정보는 공유할 수록 그 부가가치가 높아진다. 냉장고나 자동차는 혼자 소유하는 것이 이롭지만, 핸드폰과 웹 페이지는 혼자 가지고 있어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물리적 기술혁명이 곧 인간 내부의 의식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현대의 기술을 따라갈 수 있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기획자들이 창조해야 하는 것은 기술의 발전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는 문화이다. 마치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습성에 걸려들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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